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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안.. | 21/03/01 17:46 | 추천 17 | 조회 106

"3.1운동? 그딴 븅신같은 걸 왜 해 ㅋ 하지마 하지마" +106 [12]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51119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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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신각에서의 3.1운동 시위)

 

1919년, 3.1운동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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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은 후에 임시정부 설립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대한민국 제헌헌법 때부터 현행 헌법까지 단 한번도 헌법 전문에서 그 계승 정신이 언급되지 않은 적이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국체가 존재하는 한 3.1운동은 대한민국을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사회운동 중 하나이다(여담이지만 이것이 건국절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모든 헌법이 3.1운동의 계승을 인정하고, 3.1운동을 기반으로 성립된 것이 임시정부인데, 임시정부를 계승함을 부정하면 3.1운동과 현 대한민국 사이의 연결고리가 애매해지기 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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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의 평가이고, 당연히 당대에는 이것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조선인들도 존재했다. 조선인들이라고 하나같이 칼라로 연결된 프로토스는 아니었고, 일제 치하에서 이득을 누리거나, 행복하거나, 심지어 그것이 정당하다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생각하는 조선인들도 있었던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위키 등에서 "사회 진화론"을 참조해도 좋다. 그것이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 해주었기 때문. 심지어 피정복민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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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우리의 트리플 삼관왕 매국노 이완용꼐서는 3.1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언론에 경고문을 3번이나 투고하기도 한다. 

내용을 보자면 대충 "니깟것들이 뭔데 감히, 죽기 싫으면 괜히 나대지 말라"는 논지였다.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3.1운동은 불순세력의 난폭한 난동에 불과하며", "약육강식의 시대에 조선의 독립 기도는 허망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일부 친일파들은 "3.1운동 그딴 거 왜 함? 하지마 하지마" 를 주장하는 단체를 조직하니, 그것이 오늘 말할 "자제단"이다. 스스로 절제하자는 그 자제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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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단을 조직한 것은 친일파인 박중양(을 위시한 67인)이다. 이 사람은 사상적, 신념적으로 진심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통치를 정당하다고 믿고 찬양한 사람이다. 즉, "상황이 일본이 강하니까 어쩔 수 없이 지배받는다" 가 아니라 "일본의 한국 지배는 어느 모로 보나 정당하다" 고 믿는 사람이었던 것. 일제의 통치를 정당화 해 준 공적으로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자 고문을 지냈고, 백작작위를 받았다, 1945년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전 직전까지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역임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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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당시 거리)

 

하여튼 3.1운동이 벌어지자, 이 사람을 위시한 67명은 대구와 서울을 중심으로 최초로 자제단을 조직한다. 이 단체는 후에 충청남도 지역, 1919 7월까지 충청북도, 전라북도, 황해남도, 울산, 수원 등 전국적으로 확대, 지부가 조직, 확산되었다. 이들의 활동 목표는 민중과 만세 운동을 격리하는 것, 즉 운동 주도 집단과 민중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 온건하게는 조선 각지의 만세 운동 참가자들에게 시위 자제 설득과 귀가를 호소하였고, 

 

- 유언비어 자제, 폭력시위 만류, 집회 해산 주도 등의 활동을 하고

 

- 적극적으로는 자제단의 지부와 본부에 보고하거나, 조선총독부 경찰에 적극 신고하였다. 

 

- 또한, 3.1운동을 주도하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거나, 첩보활동으로 관련 정보를 수집하여 일제 당국에 넘겼다

 

다시 말하면, 자제단은 모든 단원에게 밀고의 의무를 부과하였다.

 

당연히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많은 지원을 받았고, 나중에 3.1 운동을 진압한 공로가 크다며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박중양을 포함한 자제단 주요 인사들은 조선총독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수여받는다. 박중양 본인은 바로 이렇게 3.1운동을 와해한 공로로, 조선인의 신분으로 덴노가 선임하는 일본 귀족원 의원이 된다!!

 

하지만 기억해둬야 할 것은 이들은 일제가 조직한 관립 단체가 아니라, 친일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라는 점이다. 

박중양 본인을 포함한 주도층은 조선왕조의 옛 관리 출신인 경우가 많았으며, 이 단체의 구성원은 순수 조선인이었으며, 대부분 관료, 정치인, 지식인, 유학생, 민중 계몽론자 등 당대 조선 사회의 초엘리트 지식인층이었다. 지주들도 가담하였으며(사실 조선인 지주들의 황금기는 조선 후기도 대한민국 초기도 아닌 일제시대였다). 지주들이 머슴이나 소작인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지주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억제토록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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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도열한 일본 군경)

 

사실 자제회가 조직될 명분이나 경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친일 조선인들은 이미 대한제국 시절 일제에 대한하여 일어난 의병들을 해산시키거나 토벌(!)하는 자치 조직인 "자위단"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었다(문학사를 좀 아시는 분들이라면 이인직의 "혈의 누" 같은 신소설이 생각날 수도 있겠다. 당대 적지 않은 개화 지식인들이 의병 활동을 폭력적이고 무식한 폭동이자 무가치한 저항으로 여긴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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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으로 처형당하는 사람들)

 

또한, 우리는 현재 3.1운동이 평화적인 시위였다고 말하고 대체로 맞는 말이지만, 일제가 3.1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면서(잘 모르는 사람들은 위키 등에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참조하라) 3.1운동 시위도 폭력적으로 변화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실제로 폭력사태가 발생했고. 이것이 자제단을 조직할 좋은 명분을 주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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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제단이 조직되었음을 알리는 당시의 신문기사)

 

그리하여, 1919 4 6일 박중양 등 대구지역의 관료, 지역 유지, 지식인 백여명이 대구에서 자제단을 조직하였다. 조직 성명서에서 박중양은 자제단 결성 취지에 대해 자제단은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 함' 목적으로 한다면서'소요(3·1 운동)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 단체의 규약 제3조에는 "만세 시위에 부화뇌동하지 말도록 백성들을 잘 타이르고", '만일, 불온한 행위를 감행하는 자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당장 경무 관헌에 보고하여야 한다.' 고 규정했다.

 

 

이후 자제단은 3.1 만세 운동의 확산과 함께 전국적으로 조직이 확산되었다. 이 중 수원군과 연기군, 경주군, 대구부 등에서는 자제단의 부,군지부 외에 읍면지부 조직의 예하에도 동, 리별 조직이 결성될만큼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대표자인 박중양 본인부터가 굉장히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대구에서 자제단을 만든 당일 서울로 올라가 경성 자제단을 조직했고, 이외에도 경주 칠곡 등지로도 움직이는 등 열심이었다. 그는 "유언비어와 선동에 속지 말고, 무력 시위를 자제할 것이며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가족, 친척이라 하더라도 곧바로 경찰관헌에 보고하라" 고 주장하였다. 사실, 자제단이 전국으로 확산된 속도나 활발함을 보면 당대 조선에 3.1운동에 대한 의혹의 눈길이 많았든지, 아니면 친일파가 그렇게나 많았던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만들 정도.

 

 

다만, 평양에서는 자제단에 대한 호응이 저조하였는데, 이에 실적을 내고 싶었던 조선인 관리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위협을 해서까지 자제단 가입이나 자제단 활동을 독촉하기도 했다. 혹은, 일본 현사들의 도움을 받아 "매질을 가하여 강제로 입단시킨 후 자제단의 규칙을 어기면 처벌하기도 하였다"(박은식의 기록)

 

 

자제단의 활동이 성공적이었느냐는 약간 이견이 갈리지만, 유감스럽게도 어느 정도, 혹은 상당히 공헌하였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사실 당대의 지식인층, 부유층, 엘리트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 그 위력이 못지 않았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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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박중양)

 

 참고로 박중양은 광복 후에도 살아 있었는데,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별다른 처벌을 받지 못하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진심으로 일본을 믿은 신념형 친일파였기에 그는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구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에 들어서서야 현대 조선으로 개선되었고, (일제시대의 정치는)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더하는 (선진)정치였으며,관공리의 업무(즉 행정)도 국민을 사랑하고 위하는 정치를 집행하는 것뿐이었다.."고 하면서 "일제시대에 일제가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역사를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고 주장하였고, 이완용의 묘소와 그 자녀들의 묘소에 가해지는 테러와 분묘훼손 을 보고서는 '조선인의 민족성과 수준을 알수 있는 행위'들이라며 조롱하였다.

 

 

그는 풀려난 뒤에도 끊임없이 3.1운동을 폄하하고 31절을 조롱한다. 그는 조선인들, 아니 이제는 한국인들이 31절을 기념하는 것을 위선의 극치라고 생각했다.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해외에서 독립운동 하다고 돌아온 놈들은 31운동 운운할 자격이 없고, 국내에서 독립운동하다가 사상범 된 애들은 어차피 걔들도 일제 신민이었으니 역시 할 말 없지"라고 주장하며, "조선의 독립은 미국 덕이지, 절대로 독립운동가들의 덕이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식근론, 미국 덕에 독립 등, 이 양반의 주장을 보면 데쟈뷰가 느껴진다면 기분탓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조선인들이 독립을 축하하는 것 자체를 위선으로 몰아붙이면서 "야, 일제시대 떄 창씨개명 하라니까 엄청나게 많이들 개명했잖아? 안 한 조선인이 없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일제에 저항 운운한다고? 웃기시네" 라고 주장했다.

 

 

 

 

결국  '어떤 조선인'들에게는 일제시대야말로 태평성대요, 발전과 진보의 시대였던 셈이고, 그들 눈에 31운동은 (오늘날의 평가인)"반봉건, 반외세"가 아닌 "개명된 통치에 반항하는 그냥 폭동"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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